이명우 교수의 경영 수필
신제품에 밀린 악성 재고, 필요한 업체 연결하는 촉매기업
전자회사의 재고 TV는 리노베이션한 호텔에 납품
현금 대신 받은 호텔 숙박권, 여행사에 되파는 촉매 역할
- ▲ 이명우 한양대 특임교수·경영학박사
고민하던 차에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기업을 한 곳 소개받게 됐다. 액티브 인터내셔널(Active International)이라는 회사로 기업 간의 '물물교환 거래(corporate trading)'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는 우리 회사로부터 악성 재고를 기존 정상 가격으로 구매하되, 현금으로 지불하는 게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금액의 '크레디트(향후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광고할 때 광고비 대신 이 크레디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었다. 악성 재고를 정상가로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고 평가 손실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차피 광고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 크레디트를 돈 대신 쓸 수 있다는 것이므로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그럼 액티브 인터내셔널은 무엇으로 돈을 벌까? 사들인 전자제품은 할인 가격에 파니 손해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회사는 또 다른 물물교환 거래를 통해 수지를 맞춘다. 이 회사는 신문사나 방송사 같은 미디어 회사와 접촉해 광고를 싸게 구매해서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미디어 회사로서는 비어 있는 광고 시간이나 지면을 싸게나마 팔 수 있다면 수입이 생기므로 마다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두가 이기는 '상생(Win-Win)' 거래가 아닌가?
하지만 실제 거래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 미국 시장에서 유통 채널 구축과 브랜드 위상 제고를 최고 가치로 여기던 우리에게는 우리 손을 떠난 재고가 누구에게 어떻게 팔릴지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TV 재고와 호텔 빈방 물물교환 중개
그러나 그 뒤 액티브가 고객을 개발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가는 모습은 괄목할 만했다. 액티브는 호텔의 빈방도 팔아주고, 항공사의 빈 좌석이나 렌터카의 남는 차를 팔아주는 등 재고 때문에 문제가 있는 업체라면 가리지 않고 고객을 확장했다.
예를 들어 이 회사는 초박형 평면 TV의 신제품 기술 경쟁으로 악성 재고가 될 뻔했던 한 전자회사의 평면 TV 재고를 말끔하게 해결해 줬다. 어느 호텔이 리노베이션하는 것을 알고는 그 전자회사의 재고 TV를 연결해 준 것이다.
호텔에 투숙한 고객들이란 평면 TV에 화질만 좋으면 만족하지 다른 최신 기능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으므로 최신 모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편 전자회사는 기존 유통업체에서 판매하면 상당한 할인을 해줘야 할 철 지난 모델을 제값을 받고 파는 대신에 대금 절반은 현금, 나머지 절반은 호텔 숙박권으로 받았다. 호텔 입장에서는 품질 좋은 TV를 구매하고, 대금 절반은 어차피 팔지 못하면 사라질 '빈방'으로 지불할 수 있으니 양쪽 모두 이익이다. 액티브는 또 전자회사가 호텔에서 받은 숙박권을 다시 여행사로 연결해 주어 또 다른 거래의 촉매 역할을 했다.
한 국내 자동차 회사가 신모델 도입으로 미국 시장에서 뜻하지 않게 재고가 늘어나자, 액티브는 위와 비슷한 방법으로 렌터카 업체와 연결해 줬다. 며칠만 쓰는 렌터카 고객은 원하는 크기의 자동차를 좋은 가격으로 빌리기만 하면 만족한다. 따라서 자동차 업체로서는 색상이 안 맞아서 발생한 재고나 한철 지난 구모델을 처리하기에 렌터카 업체가 좋은 고객이다.
이 자동차 회사는 재고 자동차를 팔되 정상 판매가의 절반만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 절반은 렌터카 이용권으로 받았다. 렌터카 업체 역시 품질 좋은 자동차를 구매하면서 렌터카 이용권도 판매하게 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게 됐다. 물론 이 렌터카 이용권 역시 액티브의 주선으로 여행사를 통해 거래됐다.
이렇게 자동차 제조사가 렌터카 업체, 그리고 여행사와 물물교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이전에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액티브처럼 서로 필요한 기업을 찾아서 연결해 주며 그 속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을 미국 MIT 경영대학원의 리처드 슈말렌지(Richard Schmalensee) 교수는 '촉매기업'이라고 불렀는데, 액티브의 이런 모습을 보면 촉매기업 중의 촉매기업, 또는 초(Hyper)촉매기업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전에는 고객들이 재무적 관점에서만 재고 처분을 생각했지만 이제는 유통 질서와 브랜드 파급효과를 같이 생각하는 시대가 됐다. 액티브는 까다로워진 고객의 요구를 감지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고객을 발굴하고 그 거래처를 네트워크로 묶어내며 진화한 것이다.
이렇듯 별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요구가 다양한 고객들까지 연결해 기존이 아닌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는 모습에서 촉매기업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