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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써 본 결혼 주례사
옛날 전통 혼례에서는 소나무 가지를 꺾어 올려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소나무에 붙은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살아 오백년, 죽어 오백년’,
그래서 천년의 수명을 가졌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그렇게 기원하고 싶었을 겁니다.
‘두 사람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있다면 천년의 사랑을 이어가라.’
거기다 소나무의 특징은 항상 두 잎이 하나로 엮어져 있습니다.
모든 꽃들이나 잎들은 한 가지에 붙어 있다가도
바람이 불어 떨어질 때나 낙엽으로 떨어질 때면
제각기 나 몰라라 하고 흩날리고 맙니다.
하지만 소나무 잎은 낙엽으로 떨어질 때도
홀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른들은 이렇게 축복하고 싶었을 겁니다.
‘두 사람은 이제 하나가 되었으니 죽음까지도 같이 하거라.’
저는 두 사람이 이런 사랑의 유효기간에
천년만년 변함없는 사랑으로
영원히 하나 되기를 소원하면서
몇 가지 결혼 지침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까마득하게 먼 옛날,
우리나라의 탐험대와 원정대가
세계 정복의 깃발을 들고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 정복의 꿈은 너무 쉽게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변화무쌍한 기후와 이해 못할 언어,
풍토병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참 힘겨운 항해를 하고 있는 데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김치 떨어졌다.”
그러자 대장이 할 수 없이 명령했습니다.
“돌아가자!”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던 김치,
누구에게나 ‘김치’는 있습니다.
외국을 가고 싶으나 ‘말이 안 통하겠지.’하고
미리 물러선다면 국어가 김치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오래된 습관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소심한 성격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에게 있어 김치는 뭐니 뭐니 해도 ‘부모’입니다.
모든 결혼의 원리는 ‘부모를 떠나는데서’ 시작됩니다.
탯줄을 끊는 데는 30초도 안 걸리지만
정신적 탯줄을 끊는 데는 30년으로도 모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내게 익숙한 삶의 방식,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부모의 방식이 두 사람만의 결혼 생활을 방해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이러더라.
우리 아버지는 이러시던데.’
거기다 무의식적으로 습관화된 것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부모의 유전자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입니다.
두 번째 극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종종 우리가 ‘싸가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싸가지의 원래 말은 네 가지(4가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이릅니다.
이 네 가지의 인간의 근본 된 도리를 갖추지 못했으니
초공사가 부실한 인간과 같다고 해서 욕이 되고 맙니다.
진짜 싸가지가 없는 사람은 ‘왕 싸가지’라 합니다.
그런데 왕 싸가지 보다 더한 욕이 하나 있습니다.
‘무덤덤’입니다. ‘그 사람 무덤덤 해’ 이게 무서운 말입니다.
무덤을 덤으로 이고 사는 사람이란 뜻인데요.
부부란 처음에는 그렇게 뜨겁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다가도
얼마 안가 무덤덤해지기 마련입니다.
설렘도 사라지고 고마움도 기쁨도
자꾸 무디어지기 시작합니다.
무관심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딴 데를 기웃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둘은 늘 명심하십시오.
무덤덤해 질 때면 공급해야 할 에너지가 있습니다.
칭찬의 주유를 공급하십시오.
그리고 일부러라도 이벤트를 만들어 기념일을 챙기십시오.
무덤덤을 이겨내는 길입니다.
세 번째 극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흥부가 형수한테 귀싸대기를 얻어맞았던 것은
자식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그 수모를 스스로 감당했던 게 아닙니다.
형수에게 다가가 ‘혀형, 형수님, 저 흐-흥분데요.’하는 바람에
형수가 당황이 돼서 밥주걱으로 귀싸대기를 올렸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형수님, 저 흥붑니다.’ 해야 할 것을
잘못된 소통(疏通)으로 돌아온 것은 봉변밖에 없습니다.
모든 소통은 화자(話者) 중심이 아니라
청자(聽者)자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나라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만
미국의 앰뷸런스는 모든 차량이 옆구리에는
그 글자를 제대로 써 두었는데 앞머리는 뒤집어 놓았습니다.
왜요? 앞 선 차량은 백미러를 통해 뒤의 사물을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내게는 비록 틀린 것이고 불편한 것일지라도
앞선 차량에 대한 지극한 배려 때문입니다.
소비자 중심의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게 나를 위한 길입니다.
길을 빨리 비켜줘야 씽씽 달릴 수 있으니까요.
나를 앞 세우기 앞서 배우자를 중심으로 사는 방법을 익히십시오.
다시한번 기억하십시오.
‘거울은 절대 먼저 웃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혼의 문법이자 행복의 방정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만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그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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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전통 혼례에서는 소나무 가지를 꺾어 올려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소나무에 붙은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살아 오백년, 죽어 오백년’,
그래서 천년의 수명을 가졌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그렇게 기원하고 싶었을 겁니다.
‘두 사람의 사랑의 유효기간이 있다면 천년의 사랑을 이어가라.’
거기다 소나무의 특징은 항상 두 잎이 하나로 엮어져 있습니다.
모든 꽃들이나 잎들은 한 가지에 붙어 있다가도
바람이 불어 떨어질 때나 낙엽으로 떨어질 때면
제각기 나 몰라라 하고 흩날리고 맙니다.
하지만 소나무 잎은 낙엽으로 떨어질 때도
홀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른들은 이렇게 축복하고 싶었을 겁니다.
‘두 사람은 이제 하나가 되었으니 죽음까지도 같이 하거라.’
저는 두 사람이 이런 사랑의 유효기간에
천년만년 변함없는 사랑으로
영원히 하나 되기를 소원하면서
몇 가지 결혼 지침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까마득하게 먼 옛날,
우리나라의 탐험대와 원정대가
세계 정복의 깃발을 들고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 정복의 꿈은 너무 쉽게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변화무쌍한 기후와 이해 못할 언어,
풍토병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참 힘겨운 항해를 하고 있는 데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김치 떨어졌다.”
그러자 대장이 할 수 없이 명령했습니다.
“돌아가자!”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던 김치,
누구에게나 ‘김치’는 있습니다.
외국을 가고 싶으나 ‘말이 안 통하겠지.’하고
미리 물러선다면 국어가 김치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오래된 습관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소심한 성격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에게 있어 김치는 뭐니 뭐니 해도 ‘부모’입니다.
모든 결혼의 원리는 ‘부모를 떠나는데서’ 시작됩니다.
탯줄을 끊는 데는 30초도 안 걸리지만
정신적 탯줄을 끊는 데는 30년으로도 모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내게 익숙한 삶의 방식,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부모의 방식이 두 사람만의 결혼 생활을 방해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이러더라.
우리 아버지는 이러시던데.’
거기다 무의식적으로 습관화된 것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부모의 유전자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입니다.
두 번째 극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종종 우리가 ‘싸가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싸가지의 원래 말은 네 가지(4가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이릅니다.
이 네 가지의 인간의 근본 된 도리를 갖추지 못했으니
초공사가 부실한 인간과 같다고 해서 욕이 되고 맙니다.
진짜 싸가지가 없는 사람은 ‘왕 싸가지’라 합니다.
그런데 왕 싸가지 보다 더한 욕이 하나 있습니다.
‘무덤덤’입니다. ‘그 사람 무덤덤 해’ 이게 무서운 말입니다.
무덤을 덤으로 이고 사는 사람이란 뜻인데요.
부부란 처음에는 그렇게 뜨겁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다가도
얼마 안가 무덤덤해지기 마련입니다.
설렘도 사라지고 고마움도 기쁨도
자꾸 무디어지기 시작합니다.
무관심해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딴 데를 기웃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둘은 늘 명심하십시오.
무덤덤해 질 때면 공급해야 할 에너지가 있습니다.
칭찬의 주유를 공급하십시오.
그리고 일부러라도 이벤트를 만들어 기념일을 챙기십시오.
무덤덤을 이겨내는 길입니다.
세 번째 극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흥부가 형수한테 귀싸대기를 얻어맞았던 것은
자식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그 수모를 스스로 감당했던 게 아닙니다.
형수에게 다가가 ‘혀형, 형수님, 저 흐-흥분데요.’하는 바람에
형수가 당황이 돼서 밥주걱으로 귀싸대기를 올렸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형수님, 저 흥붑니다.’ 해야 할 것을
잘못된 소통(疏通)으로 돌아온 것은 봉변밖에 없습니다.
모든 소통은 화자(話者) 중심이 아니라
청자(聽者)자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주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나라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만
미국의 앰뷸런스는 모든 차량이 옆구리에는
그 글자를 제대로 써 두었는데 앞머리는 뒤집어 놓았습니다.
왜요? 앞 선 차량은 백미러를 통해 뒤의 사물을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내게는 비록 틀린 것이고 불편한 것일지라도
앞선 차량에 대한 지극한 배려 때문입니다.
소비자 중심의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게 나를 위한 길입니다.
길을 빨리 비켜줘야 씽씽 달릴 수 있으니까요.
나를 앞 세우기 앞서 배우자를 중심으로 사는 방법을 익히십시오.
다시한번 기억하십시오.
‘거울은 절대 먼저 웃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혼의 문법이자 행복의 방정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만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그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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