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스러운 대학교수?

나는 참으로 한심스러운 대학교수임에 틀림없다. 내 몸에 붙어있는 자신의 눈썹은 보지도 못하면서 만리나 떨어진 바깥 세상일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대기 일쑤다. 뿐만 아니라 내 책에 쌓인 먼지는 털지 못하면서도 세상의 먼지는 없애겠노라 법석을 피우기도 한다.

나 같은 지식인들에게 집을 그려보라 하면, 대개는 지붕부터 처억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아예 사상누각까지 터억 하니 그려놓기도 하지만. 그러나 일하는 사람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주춧돌부터 그리기 시작하는 게 보통이다.



말하는 사람보다 쟁기 잡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한번은 비 오는 날 구두를 고치러 길거리 포장마차 식 구둣가게로 간 적이 있었다. 얼굴이 구두약만큼이나 컴컴한 구두닦이 녀석이 구두를 다 손질하고 나자 구두에 약칠을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내가 대뜸 비 오시는 날 구두약칠은 왜 하느냐고 빈정대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나를 쏘아보며 내지르는 말이 가관이었다.

“차암네, 멀쩡허게 생긴 양반이 그렁 것두 모른대유? 오늘처럼 비 오는 날 구두 가죽이 더 쉬이 망가징께, 약칠을 더 잘 해야 된다닝께유.”

나는 말문을 잊었다. 이 고상한 지식인은 그저 날씨 좋은 날, 겉으로만 번쩍거리는 구두의 광채만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이 이른바 ‘대학교수’의 진면목이었다.

민족과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밭갈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보다 쟁기를 잡는 사람이 더 많아야 하고 전쟁에 대하여 평하는 자보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더 많아야 함은 정해진 이치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계속 밭갈이에 대해 말만하고 전쟁에 대해 평하기만 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쟁기를 잡고 논밭을 일구며 갑옷을 입고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도대체 무슨 낯으로 대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개인의 사적 일상생활 속에서는 ‘나만이 최고’ 식 이기적 삶의 자세에 유감 없이 탐닉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누군가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생각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해서라 생각한다. 만일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아서 그렇다 하고, 내가 그러면 그 순간에 다른 중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일 그가 친절하게 굴면 나에게서 뭔가 좋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나의 유쾌하고 자상한 성격 때문이라 한다. 남이 출세하면 워낙 아부를 잘 해서이고, 내가 출세하면 내가 워낙 탁월해서이다. 누군가 그에게 선심용 선물을 하면 다 썩은 것이고, 누군가 나에게 선심용 선물을 하면 그건 인사성이 밝아서 그런 것이다. 남이 뜻을 굽히지 않으면 고집이 세기 때문이고, 내가 뜻을 굽히지 않으면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남이 커피를 즐기는 것은 겉멋이 들어서이고, 내가 커피를 즐기면 그것은 입맛이 고상해서이다. 남이 계단을 빨리 뛰어 오르는 것은 평소 성격이 급해서이고, 내가 계단을 빨리 뛰어 오르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이다. 남이 고향을 들추면 지역감정이 악화되지만, 내가 고향을 들추면 애향심이 돈독해진다. 남이 차를 천천히 몰면 소심 운전이고, 내가 차를 천천히 몰면 안전 운전이다. 내가 길을 건널 때는 모든 차가 멈춰서야 하고, 내가 운전할 때는 모든 보행자가 멈춰서야 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하는 식이다.


옳은 것이라도 강요할 순 없어

한번은 강화도 어느 조그만 포구로 산책을 나갔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어느 노부부가 정답게 앉아 은행 알을 팔고 있었는데, 좌판 위에 자그마한 팻말이 하나 수줍게 올라앉아 있었다. 거기에 무어라고 쓰여 있었을까? 나는 그걸 보는 순간 어떠한 고매한 철학자가 쓴 글을 읽고도 여태 가져보지 못한 순박하고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 팻말에는 딱 한 마디만 쓰여 있었다, ‘한국 은행 팝니다’라고. 나는 감동에 젖어 용도도 모른 채 은행을 덜컹 사들고 집으로 갔다가 엄청나게 당하기만 했다. ‘밑바닥 인생’들의 지혜는 이렇게도 경탄스러운 것이다.

형편이 이러하니 작은 이슬방울, 가느다란 실개천 하나하나까지 다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바다의 가없는 깊이가 온전해진다. 또한 자신이 깨끗하다하여 남의 더러움을 기꺼이 포용치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깨끗함이 아니라 결벽증에 지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여긴대서 남에게까지 그 길을 강요하려 든다면 그것은 옳음이 아니라 자기도취일 따름이다. 자기를 비우고 겸허해야 한다고 어찌 다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쓴이 / 박호성
· 서강대 사회과학대 학장 겸 공공정책대학원 원장(정외과 교수)  
· 한겨레 신문 객원 논설위원
· 학술단체협의회 대표간사
· 미국 Berkely 대학 및 캐나다 뱅쿠버 대학(UBC) 객원교수
· 저서 :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우리 시대의 상식론>,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 등 다수